2008.05.13 14:36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사건 17년 탐사 추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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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사건 16년 발굴기

진실화해위, 설립목적 맞게 ‘역사적 책무’ 다해야

“6.25전쟁을 전후해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분이 있으십니까. 12월31일까지 대통령 직속 진실과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로 신고를 접수해주십시오’. 요즘 지하철이나 지방자치단체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이색 홍보 광고다. 말 그대로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인민군이나 좌익은 물론 국군, 경찰, 우익단체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당한 비무장 민간인들의 가족에게 신원을 해주기 위해 ‘진실화해위원회’(위원장 송기인 신부)에서 내붙인 신고 접수 홍보물이다.

이 기구는 지난해 가을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된 특별법에 따라 설치됐다. 신고 마감 기한인 2006년이 며칠 남지 않은 현시점에서 접수된 신고 건수는 5천여명이 넘지 않는다고 한다. 홍보 부족 탓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가 아직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불법 학살’ 문제에 열린 자세로 대응하고 있지 않은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 민간인 불법 집단학살이 자행됐지만 역대 정부에 의해 은폐되어 온 이 문제에 대해 지난 16년 동안 전국 각지를 누비며 발굴보도를 하고, 민족 화해를 위해 내부의 곪은 상처를 치유할 것을 촉구해온 기자로서는 최근 특별법이 제정되고 위원회까지 가동되고 있지만 미흡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라는 점을 절감하고 있다.

내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때는 1989년이었다. 당시 오랜 군사정권시기를 거치고 국민의 민주화 염원이 6월항쟁으로 분출하면서 직선 대통령제가 도입된지 얼마지 않은 시점이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말도 꺼내지 못했던 국민의 억울한 죽음들에 주목해 취재를 시작하자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집단학살 문제가 취재 안테나에 걸려들었다. 당시까지 어느 언론도 기자도 이 문제에 주목하지 않고 있었다.

약 1년에 걸쳐 전국 산천을 누비며 국토 곳곳에 분단의 비극이 도사리지 않은 곳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내용들은 현장 채록 형식으로 취재해 보도를 내보내고, 1990년에는 최초로 발굴한 사건들을 묶어 <이대로는 눈감을 수 없소>라는 단행본을 펴냈다. 그날 이후 기자가 유독 이문에에 대해 줄기차게 관심을 기울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뉴스를 발굴한다는 직업정신에서 출발했지만, 몇차례 기획을 해 전국을 누비다 보니 ‘살아있는 자로서 외면해서는 안될 사명감’같은 것을 갖게 됐다. 그것은 언론의 직무유기에 대한 죄책감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자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경이 아무리 전시 위급상황이라고는 하지만 비무장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의 흔적은 나라 구석구석에 널려 있었고, 이 문제가 국민 내부에 뿌리깊은 곪은 상처로 남아있는데도 정부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이렇다 할 치유 노력이 없다는 것은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보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리는 피해 유족들의 눈빛과 격려도 내가 주변 기자들로부터 ‘칙칙한 뉴스’만 쫓는다는 지적을 들어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매달릴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지속적인 추적 결과 한국전쟁 때 전국 40여개 지역에서 비무장 민간인 100만여명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학살된 것으로 추산되었다. 민간인 집단 학살은 주로 개전 초기에 후퇴하던 군경에 의해 앞으로 인민군이 진주하면 그들을 이롭게 할지도 모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국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학살은, 개전 3개월 동안 군경이 후퇴하는 경로를 따라 경기도 여주·수원 이남에서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져, 그 상처를 입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보도연맹원 집단 학살은 대부분 1950년 7~8월 사이에 집중되었다.

수원 이남 지방의 보도연맹원들은 현지 경찰과 군부대의 교육 소집 명령을 받고 영문도 모른 채 나갔다가 학살당했다. 육지에서는 산골짜기나 계곡·강가·폐광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집단 총살당했고, 섬이나 해안 지방 곳곳에서는 배에 태워졌다가 돌을 매단 채 수장당했다. 다행히 이 사건에 대해서는 경찰청 과거사위원회가 자체 조사에 착수해 지난 9월14일 “한국전쟁 기간에 적법한 절차 없이 처형된 보도연맹원 3천5백93명을 포함해 1만7천7백16명의 민간인 학살을 확인했다”라고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어 그 학살의 근거로 쓰인 당시 내무부 치안국장의 예비검속 명령은 법적인 근거가 없음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학살을 실행한 주체는 경찰 1천81명과 군인 5천1백57명이었으며, 개전 초기에는 경찰이, 전시 계엄 하에서는 헌병 특무대 등 군이 예비검속과 학살을 주도했다고 한다. 이번 경찰 발표는 전쟁을 빌미로 비무장 민간인을 불법 구금하고 집단 학살한 정부의 책임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음으로 희생자가 많이 난 것은 전선이 북상한 1950년 말부터 1953년 휴전에 이르기까지 후방 산악 곳곳에 은거하던 빨치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국군 11사단(사단장 최덕신)이 공적을 부풀리기 위해 인근 자연 부락의 무고한 주민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산청 함양 거창(약1천5백명), 그리고 전남 함평(약524명)이 그에 해당한다. 그밖에도 경북문경(89명), 부산, 통영, 거제, 진영 등(약 3만명)등 곳곳에 걸쳐 군 경 우익단체에 의한 민간인 불법 처형이 비켜간 곳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나머지는 노근리 피난민처럼 전국 곳곳에서 미군기의 폭격과 기총소사에 살해된 경우이다.

나는 해마다 한두 차례 특집기획기사로 전국 각지의 민간인학살 문제를 현장 추적해 보도며 이문제 해결을 위한 통합특별법 제정을 줄기차게 촉구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 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언론은 민간인 학살 문제를 인권 이슈나 사회 이슈로 삼지 않았다. 시민사회단체도 그동안 한국전쟁 전후의 광범위한 민간인 집단학살을 인권 의제에서 밀어놓고 있었다. 전쟁 후 민주주의와 인권 국가를 가로막오온 획일적인 극우 이데올로기 체제가 전쟁 전후 일어난 광범한 야만적 민간인 학살을 토대로 성립됐다고 볼 때 지난 50년간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주장해온 세력의 싸움은 바로 학살, 납치, 고문, 은폐및 조작 등에 맞서 그런 잘못된 관행을 허물어뜨려온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이성과 양심은 전후 40여년 동안 반문명과 야만의 사회 분위기를 잉태한 원죄라 할 대량학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처리할지 마주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사회분위기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2000년 봄 한국인권재단이 주최하는 ‘제주 인권대회’에 나는 이 문제를 주제로 보고서를 만들어 현장에서 발표했다. 전국각지의 인권단체 활동가들과 시민사회단체, 법조계, 대학 교수 등 1백여명이 사흘간 참석한 이 대회에서 ‘민간인학살 인권 의제화’주장은 큰 반향을 불렀다. 한양대 리영희 명예교수, 한림대 지명관 교수 등 원로 학자들 뿐 아니라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 한홍구 교수 등 소장학자들이 ‘이제는 우리가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겠다’고 나왔다. 대회 이후 김동춘 교수가 주도해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범국민위원회’가 구성됐다. 범국민위는 이후 전국 각지의 유족대표들과 실태조사, 세미나, 공청회, 특별법제정운동 등을 줄기차게 벌여나갔고, 마침내 지난해 가을 여야 합의로 이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부족하나마 특별법에 따라 대통령직속 기구가 구성되기까지는 지난 5년에 걸친 유가족들의 눈물과 한숨, 투쟁이 결정적인 동력이었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원회가 설치돼 활동에 들어간 뒤에도 피해 유가족들은 아직 안도하지 못하고 있다.

진실화해위는 4년의 시한을 갖는 한시적 기구라는 점에서 유가족은 이런 위원회가 실질적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불신을 거두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 위원회에 조사 신청이 접수된 건수만도 무려 4천7백62건. 그 가운데 민간인 학살 조사 신청이 4천1백53건으로, 학살 사건 단위로는 5백 건을 넘었다. 그러나 그 사건을 조사하는 위원회 조사관은 40여 명에 불과하다. 피해 규모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10분의 1에도 못 미쳤던 제주 4·3사건 조사 당시의 인력과 같다. 그나마 절반에 이르는 행정 보조 인력을 빼면 실제 조사 인원은 20여 명뿐이다.

이처럼 턱없이 부족한 인력으로 방대한 사건들의 자료 조사와 현장 검증, 배경 조사 등을 수행해 진상을 밝힌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위원회는 지금까지 고작 20개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서만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 누락된 4백80여 개 사건에는 대책이 없다. 이에 크게 실망한 전국 각지의 피학살 유족들은 결국 9월 중순부터 송기인 위원장실을 점거한 채 조사 인력 증원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위원회 인력을 관장하는 행정자치부는 ‘공무원 정원 감축 정부 방침’을 들어 위원회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자세이다. 이에 대해 피해 유족들은 “진실과화해위원회는 4년간 한시적으로 국가 공권력에 의해 학살당하거나 인권 침해를 입은 피해자의 진실을 밝혀 국가가 도덕적으로 거듭나는 계기로 삼겠다고 만든 특수한 조직인데도 행자부가 한시적인 위원회의 존립 목적과 특수성을 무시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현재 진실화해위원회는 외부 용역을 다시 주어 적정한 조사 인력을 산출해 정부에 증원을 요청하겠다는 입장이다.

하루속히 위원회가 본래의 설립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체제를 정비해 ‘역사적 임무’를 다해내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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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0 Comment 6
  1. 장준은 2008.07.12 11:4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나는유기여전쟁을보고십다.

  2. swiss replica 2012.08.03 18:1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면 서로 잘난 체 하면서 패거리나 하게 된다. 하루빈 선생을 모시지 않는 사람은 일본고정간첩이다. 서울 남산에 하

  3. Ugg boots sale 2012.11.02 11:4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thanks for sha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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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시지 않는 사람은 일본고정간첩이다. 서울 남산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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